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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 Bang

조사선

Busong 2024. 11. 24. 22:18

생활선 이해(조사선)

좌선은 연습이요, 생활이 실전이다.

닦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을 쉬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립다거나 밉다거나 하는 생각이 나거든, 그 생각을 얼른 부처님께 바쳐라.

―《마음을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우리의 마음은 어느 한 군데에 초점(Focus)을 맞추면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무심해지기 쉽다. 가령 동일한 장소에서 똑같은 소리가 지속해 날지라도, 정신을 다른 곳에 쏟다보면, 그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 TV를 볼 때, 어느 한 채널에서 공포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고 하자. 그때에 공포심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차라리 채널을 돌려 다른 프로그램을 택함으로써 관심을 바꾸는 것이 분위기 전환에 도움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이치에 입각해서, 화두를 통해 무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무심형 간화(無心形 看話)입니다. 이것은 집중형 간화(集中形 看話)와는 다릅니다. 집중형 간화는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화두에 몰두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삼매에 이르도록 하는 방식이다.

무심형 간화는 이와 달리 애당초 무심 상태로 출발하는 것이다. 즉 처음부터 화두를 챙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몰두할 뿐이다. 무심이란 아무런 잡념이 없다는 뜻이다. 곧 무의식적 자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생각 망념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좌선을 하든 밥을 먹든 잠을 자든 그저 무심히 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이러한 무심상태가 흔들릴 때에 얼른 화두를 챙기는 것이 무심형 간화이다. 역순경계(逆順境界)가 나타나 한 생각 망념이 일어나는 순간 무분별심으로서의 화두를 챙김으로써 본 마음·참 나 즉 평상심으로 돌이킬 따름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순경계는 끊임없이 외부나 혹은 내심에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거의 지속적으로 화두를 챙겨나가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어쨌든 평상심으로서의 무심을 우선적 전제로 하고 있는 점에서 집중형 간화와는 입각처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집중형 간화는 상당한 끈기와 집중을 요하는 데다가, 의도적 방법으로 인하여 자칫하면 상기병을 유발시킬 수 있다. 아울러 미래지향적 태도가 생겨나기 쉽다. 그래서 마치 고시 공부하듯이 짧은 시일 안에 공부를 마쳐보겠다고 욕심 내어 달려들었다가 중도하차하기 쉽다.

그렇지만 무심형 간화는 철저히 현재 지향적이다. 자성청정심 즉 평상심이 도임을 굳게 믿고, 현재에 몰두하면서 다만 흔들릴 때마다 화두를 챙겨 본 마음을 회복하면 그 뿐이다. 이 때의 화두는 마치 관운장의 청룡도와 같다. 청룡도는 시도 때도 없이 24시간 휘두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적과 맞닥뜨렸을 때 휘둘러야 유용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무심형 간화는 실생활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실생활에의 몰두에 참다운 가치가 부여되고, 나아가 주위와의 부딪힘 자체가 유용한 수행기회가 되어진다. 그럼으로써 좌선은 다만 연습에 불과할 뿐이요, 생활이 실전이 됨으로써, 우주가 수련장이고 만나는 이마다 선지식이 되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닦을 수 있는 열린 참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선(禪)은 안심법문(安心法門)이며, 선사(禪師)는 심성치료사

달마대사에게 혜가가 말했다.

"저의 마음이 편안치 않으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 주십시오(我心未寧 乞師與安)."

대사가 말했다.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 주리라(將心來 與汝安)."

혜가가 대답했다.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얻을 수 없습니다(覓心了 不可得)."

대사가 다시 말했다.

"네 마음을 벌써 편안케 해 주었느니라(與汝安心竟)."

―《선문염송(禪門拈頌)》―

이상의 대화는 중국 땅에 처음으로 선법을 전한 보리달마와 그 제자 혜가와의 문답이다.

혜가는 책도 많이 읽었으며, 이곳 저곳으로 가르침을 구해 다녔으나 궁극적으로 불안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결국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인 보리달마를 만나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선법문(禪法門)은 곧 안심법문(安心法門)이며, 선사(禪師)는 결국 심성치료사에 다름 아닌 것이다. 실제로 보리달마의 가르침은 대승안심지법(大乘安心之法)이라 불려지고 있으며, 달마선의 주목되는 특색으로서 안심(安心)을 지적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도 여러 가지 생각을 지니고 이 곳에 오셨을 것이다. 불안한 마음, 초조한 마음, 혹은 망설이고 설레는 마음, 혹은 뭐 특별히 배울게 있겠나 하는 마음, 혹은 커다란 기대감 등등. 그렇지만 여러분! 불안한 마음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가져온 일체의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을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떨쳐버리십시오. 그리하여 저 백짓장처럼, 또 저 허공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지내보면 어떻겠는가?

앞으로 3박 4일간,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던 환경에서 차단되어 전혀 새로운 상황에서 지내게 된다. 이야말로 자신을 변화시킬 절호의 찬스가 아닐까?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어버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임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가히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이번 기회는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실행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인 것이다.

집안 걱정일랑 놓아 버리십시오. 나 하나 없으면 모든 게 엉망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떠오른다. 기타 모든 이해득실을 놓아버리십시오. 다만 수련기간 동안만이라도. 아무도 여러분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 공부할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이 주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미 지나간 과거에나 연연해 집착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염려한다면, 과연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마음을 닦을 수 있겠는가?

사고의 틀 자체를 확 바꾸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묵언도 하고, 참회·기도·좌선도 하는 것이다. 말 안하고도 생활할 수 있는 기회, 특이한 체험이며, 그만큼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미 탁월한 선택을 하셨고, 이제는 그 기회를 유용히 살리는 일만 남았다. 그것은, 수련기간동안 자기를 죽이고, 오직 프로그램에 맞추어서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저를 따라서 낭독하십시오.

'불도를 배운다고 하는 것은 자기(自己)를 배우는 것이다.

자기를 배운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

자기를 잊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물이 스스로 명확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서로 문답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묻고 제가 답하겠습니다. 물으십시오.

수련자 : 저의 마음이 편안치 않으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 주십시오.

법 사 : 마음을 가져오십시오. 편안케 해 주겠습니다.

수련자 :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얻을 수 없습니다.

법 사 : 여러분의 마음을 이미 편안케 해 주었습니다.

그림의 떡은 먹을 수 없다

좌선은 참으로 효과가 있다. 그것은 몸으로써 실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의 떡은 역시 먹을 수 없고, 사람들에게 음식물 이야기를 해 준다고 어찌 그것으로 배를 채워줄 수 있겠는가? 앞에 가로막힌 것을 치우려해도, 그것을 치우기 위해 질러둔 뒤의 쐐기가 오히려 방해가 된다. 《화엄경》에 이런 말이 있다. '마치 가난한 자가 밤낮없이 남의 재산을 세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은 한 푼도 얻을 자격이 없는 것처럼, 귀로 듣는 학문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능가사자기》―

종일수타보(終日數他寶)에 자무반전분이라(自無半錢分)이라. 종일토록 남의 보물을 세더라도 자기 것은 반전의 몫도 없다는 말이다. 마치 요사이 은행 창구 직원들이 하루 종일 돈을 세고 있지만,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그림의 떡으로 배를 채울 수 없으며, 종일 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배가 불러질 이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으나, 선사들이 우선적으로 권하는 것은 바로 좌선이다. 실제로 수행을 하다보면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여러 자세 가운데서 가장 안정된 자세가 바로 가부좌이다. 석존께서도 보리수 밑에서 가부좌하신 채 성도하셨다. 보리달마스님도 소림굴에서 계속 벽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기에, 벽관(壁觀)바라문이라 불렸다. 구조물 가운데서도 피라미드 같은 삼각형 구조물이 가장 안정되어 있다 한다.

가부좌 자세를 올바르게 취하면, 앞과 뒤는 물론 옆이나 위에서 바라보아도 거의 삼각형 구조를 이룸을 알 수 있다. 또한 한 자세로 가장 오랫동안 견디기 쉬운 것이 바로 가부좌가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참선이라 하면 먼저 좌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네 죄를 가져오라.

이조(二祖) 혜가대사에게 삼조(三祖)가 물었다.

제자는 몸이 풍병에 걸렸으니, 청컨대 화상께서 죄를 참회케 해 주소서.

이조가 대답했다.

죄를 가져오너라. 참회해 주리라(將罪來 與汝懺)

삼조가 말없이 있다가 말했다.

죄를 찾았으나 찾을 수 없습니다(覓罪了 不可得)

이조가 말했다.

그대의 죄는 다 참회되었으니, 불·법·승에 의지해 살라(與汝懺罪竟 宜依佛法僧住)

삼조가 말했다.

제가 지금 화상을 뵈오니 승보(僧寶)는 알았으나, 불보(佛寶)와 법보(法寶)는 무엇입니까?

이조가 대답했다.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보니라. 불보와 법보가 둘이 없나니, 승보도 그러하다

삼조가 말했다.

제자는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이 안팎이나 중간에 있지 않으며, 그 마음이 그런 것처럼 불보와 법보도 둘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조가 몹시 대견하게 여겼다.

―《禪門拈頌 선문염송》―

삼조 승찬스님은 요새말로 하자면, 문둥병에 걸렸던 것이다. 사소한 질환에만 걸려도 내게 무슨 업장이 있어 병에 걸리게 되었나를 한탄하곤 한다. 그런데 문둥병의 경우 예전에는 하늘이 내린 형벌 즉 천형(天刑)이라고 해서 나와 남이 모두 죄인시하고 기피하던 병이다. 그래서 이조 혜가스님을 만나 죄를 참회케 해 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혜가스님은 앞서 달마스님과의 문답과 유사하게, 너의 죄를 내어놓아 보라고 답했던 것입니다. 찾아보아도 내어놓을 죄가 없으니, 더 이상 죄의식에 쌓여 지낼 필요가 없음을 깨치게 한 것이지요.

조석 예불에 독송하는 천수경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백 겁 동안 쌓인 죄가

한 생각에 몰 록 소탕되어 없어지네.

마른 풀 더미에 불붙은 것과 같아서

소멸하고 다하여 나머지가 없네.

(百劫積集罪 一念頓湯盡 如火焚枯草 滅盡無有餘)

죄는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마음 따라 일어날 뿐이네.

마음 만약 소멸하면 죄 또한 사라지니

죄도 사라지고 마음도 소멸해서 둘 다 공(空)해지면

이것을 이름하여 진정한 참회라도 한다네.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罪亡心滅兩俱空 是卽名爲眞懺悔)

우리도 승찬스님처럼 한 마디·한 구절에 바로 죄가 참회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참회야말로 참선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라 할 수 있다. 탐·진·치, 삼독이 가득한 상태에서 좌선한다고 앉아있어 보아야, 끝없이 괴롭기만 할 따름이다. 물론 이를 꾹 참고 오랫동안 앉아 있다보면 서서히 삼독이 가라앉음을 느끼겠지만, 일반적으로 먼저 참회를 권장하고 싶다.

진실한 참회를 통해서 마음과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면, 신심도 새록새록 더해가고 앉아있기도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회는 어떠한 요령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방법이 효험이 있는 것이라 권장해 본다.

그 요령은 먼저 108배를 천천히 하면서 매 1배 때마다 한 가지씩 참회하는 것이다. 욕심부린 것·성낸 것·어리석었던 것의 순서로 하되, 우선 욕심 낸 것을 바로 지금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한가지씩 참회한다. 이것이 끝나면 성낸 것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한가지씩 참회한다. 다음에는 어리석었던 행동을 참회합니다. 어리석음의 첫째는 자기 잘났다는 생각이며, 인과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우러나온 모든 어리석은 짓을 한가지씩 떠올리면서 과거로 거슬러 참회한다. 마지막으로 비록 지금 생각은 나지 않지만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일체를 108배 끝날 때까지 참회하는 것이다.

이러한 참회를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무조건적인 참회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꼭 필요한 욕심이라든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화를 냈다던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참회해야 한다. 결국 욕심 내고 화내고 어리석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급적이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요령으로 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참회뿐만 아니라, 기도나 참선 등도 마찬가지이다.

물방울이 돌을 뚫는 것은, 지속적으로 같은 장소에 떨어져 내리는 까닭이다. 분산되어서는 큰 힘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규칙적인 식사시간이 되면 자연 배가 고파지고 식욕이 당기는 것처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요령으로 행하는 참회는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루 20-30분 정도씩만이라도 꾸준히 참회하다보면, 열흘 내지는 보름 정도만 지나도 몸과 마음이 한결 거뜬하고 개운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짊어지고 있던 업장의 무게가 덜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마음이 훨씬 가벼워짐을 느낄 때까지 계속해 나가자. 그리고 나서, 참회를 통하여 비워진 마음자리는 반드시 커다란 서원으로써 채워놓은 것이 좋다. 서원은 클수록 좋지만, 가급적이면 자신의 현재 상황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 더욱 좋다. 예컨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간절할 경우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다 깨달음을 얻어 지이다'하고, 병고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 다 병고에서 벗어나 지이다'하며, 마음 편안함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 다 마음이 편안해 지이다'하는 식으로 발원하는 것이다. 혹은 특별한 바램이 없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하는 것도 무방하다.

'모든 사람들이 몸과 마음이 밝고 건강해져서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은 성취해서

부처님 시봉 잘 하길 발원'

지극한 도(道)는 어렵지 않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至道無難)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唯嫌揀擇)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但莫憎愛)

통연히 명백하니라.(洞然明白)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毫釐有差)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天地懸隔)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欲得現前)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莫存順逆)

―《신심명(信心銘)》―

지극한 도는 결코 어렵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고도의 학식이나 풍부한 경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분간하고 선택하는 일만 그치면 된다는 것이다.

유행가 가사에도 있는 것처럼, 사랑도 미움도 없는 사람은 근심·걱정·괴로움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처럼 단순한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애착하거나 증오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사랑과 미움은 한 뿌리임을 알 수가 있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 외부조건은 다만 보조요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어떤 사람을 지극히 사랑한다고 하자. 그때 그 상대방의 어떠 어떠한 매력에 이끌렸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마음 가운데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그 상대방을 통해서 채우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남이 나를 좋아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내가 정말 잘 나고 매력이 있어서 좋아한다기보다는, 나를 좋아하는 이의 그 마음에 무언가 애착 같은 것이 근본요인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조금 남다른 면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보조요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경계(逆境界)가 닥쳐왔다고 해서 좌절할 것도 없으며, 순경계(順境界)가 왔다고 해서 들떠 좋아할 것도 없다. 행복의 결정적 요인은 결코 외부 조건이 아닌 내부 마음에 있음을 아는 이에게는, 역경계야말로 자신의 마음을 닦을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순경계는 오히려 아상을 증장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한층 조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수행하는 이는 역순경계를 모두 심상히 생각하고 다만 참 나를 깨치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

조사께서 주장자로 방아를 세 번 치고 가시거늘 내가 조사의 뜻을 알고, 삼경에 조사를 찾아가니 가사로서 문을 가리고 아무도 모르게 한 뒤, 금강경을 설해 주셨다."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구절에 이르러 일체만법이 자성 속에 있음을 크게 깨닫고 조사께 말했다.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오.

자성이 본래 불생 불멸함을 어찌 알았으리오.

자성이 본래 구족함을 어찌 알았으리오.

자성이 본래 동요가 없음을 어찌 알았으리오.

자성이 모든 법을 창조함을 어찌 알았으리오.

―《육조단경 六祖壇經》―

자성의 발견과 그 대중화. 이것이야말로 육조 혜능(六祖 惠能)스님의 크나큰 업적이다. 육조스님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드라마에는 주인공이 있으며, 그 주인공을 보다 부각시키기 위한 상대역이 설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상대역은 당연히 뛰어난 인물이며, 거의 최고인 듯 싶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주인공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육조스님에게 있어서 그 상대역은 신수대사였다.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여걸황제가 당나라의 측천무후이다. 이 여황제는 두뇌가 비상하고 성격도 과감했다고 한다. 한편 불교에 관해서도 관심과 조예가 깊어 화엄경론을 발간하면서 머리글을 붙일 정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여걸황제이니 만큼, 자신에게 불법을 가르칠 스님을 선정하는 것도 매우 까다로웠음이 당연하다. 당시의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고승들 가운데서 두 명이 뽑혔고, 그 둘 가운데 한 명을 택하는 방법으로 두 스님을 맨 몸으로 목욕탕에 들어가게 하고, 아름다운 궁녀들로 하여금 옷을 벗고서 시봉을 하게끔 했다. 스님들의 수행정도를 확실히 가늠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토록 험난한 시험을 거쳐서 마지막으로 선정된 고승이 대통신수(大通神秀, 607~706) 스님입니다. 신수스님은 측천무후는 물론 중종과 예종에게도 극진한 예우를 받아, 세 황제의 국사(國師)이며 장안과 낙양의 법주(法主)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박학다식하여 경. 율. 론은 물론이고 노장이나 훈고학, 음운 등에도 통달하였다고 한다. 또한 오조(五祖)인 홍인스님 회상에서도 상수제자로서 인정받았던 터였다. 그렇지만 이처럼 각 방면으로 탁월했던 신수스님으로서도 한 발짝 물러나 그 기량을 양보하고 감히 도력을 짐작하기 어려웠던 분이 바로 육조혜능(六祖惠能, 638-713) 스님이시다.

육조라는 말은 여섯 번째 조사(祖師)라는 뜻이다. 경론 연구와 강연 등에 전념하던 당시 중국불교의 이론적 경향에 대해서, 오직 마음법을 중시하는 실천적인 선(禪)을 고취함으로써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가 된 이가 보리달마(菩提達磨)이다. 보리달마는 이조(二祖) 혜가에게 법을 전하고, 혜가는 삼조(三祖) 승찬에게, 승찬은 사조(四祖) 도신에게, 그리고 도신은 오조(五祖) 홍인에게 법을 전하였으며, 홍인에게서 마음법을 전수받아 육조(六祖)가 된 이가 바로 혜능스님인 것이다.

혜능스님이 앞서 언급한 신수대사를 제치고, 육조로 인가 받아 의발을 전수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행자(行者) 때였다. 가히 획기적인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갓 입산해서 겨우 팔 개월 동안 방앗간에서 일만 하고 있던 행자 신분의 몸으로서 인가의 표상인 가사와 발우를 오조 홍인스님에게서 전수 받았다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단박에 스스로의 자성을 보기만 하면 깨칠 수 있다고 하는 돈오(頓悟)의 예를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혜능스님은 출가 이전에도 다만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 나무를 해서 어머니를 봉양하던 평범한 나뭇꾼에 불과했다. 다만 한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어느 날 땔나무를 팔고 오는 길에 《금강경》읽는 소리를 한 번 듣고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쳤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홍인화상을 찾아가 인사드리니 홍인화상이 혜능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에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며, 이제 나에게서 새삼스럽게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제자는 영남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지금 짐짓 멀리서 와서 큰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옵고 오직 부처 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너는 영남사람이요, 또한 오랑캐거니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이상의 내용이 홍인화상과 혜능스님이 처음 만나 주고받은 대화의 전부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혜능스님은 이미 출가이전에 불성(佛性)에 대한 어떠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지역이 다르고 몸뚱 아리가 다르다 하더라고 불성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하는 확신이야말로, 일자무식이었던 혜능이 당시 홍인 문하에서 가장 각광받던 신수를 제치고 의발을 받게 된 까닭이 아니었을까?

전법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게송에서도 혜능스님은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라고 주장함으로써, 몸은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 묻지 않게 하라는 신수의 게송과는 그 근본적 입장에서부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실상 신수스님의 게송이야말로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본성은 밝은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다. 그러나 업장의 때가 끼어 있어서 본성을 보지 못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수행을 해서 업장의 티끌을 벗겨내면 바야흐로 본성이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꾸준한 수행을 통해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혜능스님은 한 차원 훨씬 올라서 있다. 불성은 항상 청정한 것이다. 거기에는 이미 수행을 통해서 벗겨내야 할 티끌이나 먼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성품을 보는 것(見性)이다. 그것은 이제부터 닦아서 부처가 되려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가 있는 그대로 본래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출신이나 신분은 물론, 학식이나 덕망과도 관계가 없다. 오직 자신의 성품을 스스로 돌이켜 비추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하나 없도다.

(竹影掃階塵不動이요 月穿潭底水無痕이로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남악회양선사가 육조스님께 참례하러 왔을 때 육조스님이 물었다.

어느 곳에서 왔는가?

숭산(崇山)에서 왔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什徼物恁徼來)?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곧 맞지 않습니다.

도리어 가히 닦고 증득할 수 있겠는가?

닦고 증득함(修證)이 없지는 않으나, 오염은 곧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이 오염되지 않는 것(不汚染)이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하는 바이다. 네가 이미 이와 같고 나도 또한 이와 같다.

―《육조단경 六祖壇經》―

이 '오염되지 않는 것'은 너와 내가 이미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것다. 오랜 동안의 수행을 거쳐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학식을 통한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일찍이 더러워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단박에 깨닫는 것(頓悟)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마음 돌이켜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見性)이다.

이처럼 자성을 단박에 깨쳐서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이미 갖추고 있는 불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불교 수행의 기본적 체계인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에 관한 견해도 기존의 틀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선 신수스님은 계·정·혜를 말하기를 '모든 악을 짓지 않는 것을 계라고 하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라고 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을 정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계·정·혜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그대로 전통적이고도 고전적인 해석이다. 어찌 보면 정통적인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혜능스님의 견해는 사뭇 다르다. 혜능 스님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마음의 땅(心地)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계요, 마음의 땅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정이요, 마음의 땅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혜이니라..

이처럼 혜능스님은 자성심지법문을 하고 계시다. 자기의 성품은 본래 그릇됨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다(自性은 無非·無亂·無痴). 이것은 평상심이 도(道)라는 표현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평상시의 우리의 마음은 무분별심이다. 그릇되거나 혼란스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지도 않다. 다만 눈에 부딪치고 귀에 들리는 경계에 휩쓸려 분별을 일으킬 따름이다. 이렇게 자기의 성품을 단박 닦을 것(頓修)을 권하고 있는데 혜능스님법문의 큰 특징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위와 같이, 범상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이룩한 육조스님에 의해서 참선 대중화의 발단이 마련된 것이다. 참선은 이제 더 이상 특수한 사람들이 특별한 장소에서 정하여진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열린 참선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 경우 필요로 하는 것은 다만 자성에 대한 확신이며, 닦는다는 것은 바로 그 자성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토록 뛰어난 가르침을 베풀어 지금 이 시대에까지 참선이 전해 내려올 수 있도록 만든 분이 바로 육조 혜능스님인 것이다.

한편, 혜능스님의 법문을 기록한 《육조단경》의 <부촉유통분>에 의하면, 혜능스님은 자신이 멸도한 뒤 5-6년이 지나 마땅히 한 사람이 와서 자신의 머리를 가져가리라 예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 신라 땅의 삼법(三法)스님은 혜능대사의 높은 이름을 듣고 꼭 한 번 뵙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혜능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나는 후생으로 변방에 살고 있어서 당대의 진불(眞佛)을 친견치 못했다고 한탄했다. 그때 전북 익산군 미륵사의 규정(圭晶)스님이 중국에서 돌아와 혜능이 설한 《법보단경초본(法寶壇經抄本)》을 보여 주었다. 감격한 삼법스님은 공경스런 마음으로 향을 사루고 이를 독송했다. 그 가르침은 마치 혜능이 직접 삼법스님 자신에게 설하는 것과 같은 감동을 준다. 그리고 그 초본에 실린 혜능의 예언에 따라 중국으로 잠입하여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머리)을 신라로 모셔졌다. 그 정상이 바로 현재 지리산 쌍계사의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에 봉안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해동고승전》의 저자인 각훈(覺訓)스님이 1103년에 썼다고 전해지는《선종육조혜능정상동래연기(禪宗六祖惠能頂相東來緣起)》에 전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면 육조스님의 정상이 쌍계사 금당에 모셔지게 된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정상탑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의 방광(放光)을 통해 상서로운 영험을 보여 준 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육신보살(肉身菩薩)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육조스님의 신비스런 법력이 깃들인 신앙적 귀의처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참선의 정맥이 바로 이 땅, 지리산 쌍계사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육조스님의 정상(頂相)은 곧 참선의 정수·골수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발달된 참선이 이제 한국으로 이어져 자리잡고, 나아가 세계화되어 가는 추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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